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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보경사

by 레오마니 2025. 11. 3.

 

며칠 전, 정말 오랜만에 오랜 지기 언니들과 함께 포항 보경사 산행을 다녀왔습니다.
아이 유치원 친구 엄마모임 언니들이라 서로를 너무 잘 아는 사이입니다.
한달에 한번씩 카페에서의 모임만 하다가 가을 산을 보고 싶어서 계획한 산행입니다. 
이번엔 “우리 진짜 한번 가자!” 하며 어렵게 시간을 맞추고, 가을의 끝자락을 느끼러 보경사로 향했습니다.

 각자의 속도로 걷는다는 것

언니들 분위기가 처음부터 산행을 한다기 보다는 가을산 구경온 느낌이였어요 ㅎㅎ

그 중 한언니랑 나랑 소금강까지 올라가자고 하고 올라는 갔지만....

결국 우리는 다 같이 정상까지 가지 못했습니다.
사실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요.
누구는 무릎이 아프고, 누구는 평소 운동을 거의 안 했으니까요.
그래서 “각자 할 수 있는 만큼만 걷자”는 원칙을 세웠습니다.

누군가는 조금 더 올라가 보기로 하고,
누군가는 중간에서 기다리며 사진을 찍고,
또 누군가는 계곡 옆에서 잠시 쉬며 물소리를 들었습니다.

이게 바로 우리 나이대의 여행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누구와 비교하지 않고, 각자 체력에 맞게,
하지만 서로를 기다려주며 함께하는 여행 말이에요.
예전엔 “끝까지 가야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지금 이 순간이 즐겁다면 그걸로 충분하다”는 걸 자연스럽게 깨닫는 나이가 된 것 같습니다.

 

 

 내려오는 길에 보인, 맑은 물의 아름다움

산을 오를 때는 주로 발밑만 보게 되잖아요.
“넘어지지 말자, 숨 좀 고르자” 하다 보면 주변을 제대로 볼 여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내려올 때는 이상하게 시야가 확 트이더군요.

오르느라 못 봤던 경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햇살이 비추는 계곡물은 정말 투명했습니다.
맑은 물이 바위 사이로 흐르며 반짝이는 모습이 너무 인상적이었어요.
산속의 공기와 물 냄새가 섞인 그 순간, 그냥 그 자리에서 한참을 서 있었어요.
“아, 이래서 사람들이 보경사 계곡을 찾는구나.”
새삼 자연의 힘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1시 예약한 진주식당, 꿀맛 같은 백숙

산행이 끝나고, 배가 고파지기 시작할 무렵.
우리는 1시에 예약해둔 보경사 근처 진주식당으로 향했습니다.
이미 여러 사람들에게 “백숙 맛집”으로 입소문이 자자했던 곳이라
모두 기대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우리가 자리에 앉자마자 바로 나온 백숙 한 상—
그야말로 ‘꿀맛’이었습니다.

닭고기는 부드럽고 야들야들했고, 국물은 깊고 고소했습니다.
한 숟갈 떠먹는 순간 피로가 확 풀리는 기분이었어요.

“역시 산행의 마무리는 백숙이지!”
다들 수저를 내려놓을 틈도 없이 폭풍 흡입 모드에 돌입했습니다.

거기에 호박전이 함께 나왔는데,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해서 정말 맛있었어요.
기름기 부담도 없고, 고소한 향이 퍼지며 입맛을 돋워줬습니다.
다들 “이 조합은 진짜 찐이다!” 하며 감탄을 멈추지 않았죠.

같이나온 생선으로 숙성시킨 김장김치, 물김치, 갓김치(?), 그리고 한숟갈씩 먹도록 약간의 흰쌀밥과 쌈배추,강된장이 나왔습니다. 그게 또 진주식당의  매력이더라구요

 곡강카페에서의 여유 한 잔

식사를 마치고 포만감에 잠긴 우리는
돌아오는 길에 곡강카페에 들렀습니다.
산 아래 한적한 분위기 속에서 커피 향이 퍼지는 공간이었어요.

창가 자리에 앉아 라떼 한 잔을 시켰습니다.
따뜻한 컵을 두 손으로 감싸니,
몸과 마음이 동시에 녹아내리는 느낌이었습니다.

 

 오래된 친구들과의 대화, 그 소중함

나이가 들수록 친구를 만나는 일은 점점 어려워집니다.
젊을 때는 시간도 많고 에너지도 넘쳤지만,
이제는 일, 가족, 건강 등 서로의 사정이 다르기 때문에
이런 시간을 갖는 게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이날의 대화는 더 따뜻했습니다.
“우리 이제 체력 좀 키워야겠다.”
“내년 해외 여행을 위해 체력을 더 키워야 해, 담달에는 경주에 가보자.”
서로의 몸 걱정부터 시작해서,
아이들 이야기, 부모님 이야기, 그리고 이제는 건강 이야기까지.

세월의 흔적이 대화에 묻어나지만,
그 안엔 여전히 예전처럼 웃고 떠드는 ‘아이들 어렸을때 그때의 그 모습’이 있었습니다.
그게 참 좋았습니다.

 

 

 하루의 끝에서 느낀 소소한 행복

돌아오는 길, 차 안에서 창밖을 보며 생각했습니다.
오늘 산을 끝까지 오르지 못했다고 해서 아쉬울 건 없었습니다.
오히려 각자 할 수 있는 만큼,
그 자리에서 서로를 기다려주고 웃을 수 있었다는 것,
그게 오늘의 가장 큰 의미였던 것 같습니다.

맑은 물, 따뜻한 백숙, 향긋한 라떼, 그리고 오랜 친구들.
이 네 가지가 만들어낸 하루는 그 어떤 여행보다도 값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