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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일(교육업)

조선의 실학자 정약용, 실용의 철학을 실천한 선비

by 레오마니 2025. 6. 15.

< 수원 화성과 목민심서로 남긴 민본과 개혁의 정신>

조선 후기, 혼란과 위기의 시대 속에서도 백성의 삶을 고민하며 행동으로 옮긴 지식인이 있었다.
그는 권력도, 부귀영화도 추구하지 않았지만, 한 나라의 질서와 제도를 다시 설계하려 했고,
과학기술을 행정에 도입하여 ‘실용’이 살아 있는 정치 철학을 구현하고자 했다.
그 인물이 바로 다산 정약용(1762~1836)이다.

 

정약용은 조선 후기 대표적인 실학자로, 학문적 깊이와 실천적 사상을 겸비한 진정한 공공 지식인이었다.
그가 남긴 가장 대표적인 유산은 수원 화성의 설계, 그리고 『목민심서』를 비롯한 행정 실무서다.
이 글에서는 정약용의 삶과 철학, 그의 주요 업적을 통해
왜 그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회자되는 위대한 인물인지를 되짚어 본다.

조선의 실학자 정약용, 실용의 철학을 실천한 선비
조선의 실학자 정약용, 실용의 철학을 실천한 선비

 

1.조선 후기의 시대 배경 - 실학의 필요가 절실했던 시대

정약용이 살던 18~19세기 조선은 내부적으로는 세도 정치와 부정부패,
외부적으로는 서구 문물의 등장과 민중의 각성이 교차하던 혼란기였다.

양반 중심의 신분제는 부패했고, 백성들은 각종 세금과 부역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성리학은 이상주의로 흐르며 현실과 점점 동떨어졌고,
실제 민생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용 학문, 즉 ‘실학’이 절실하게 요구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정약용은 성리학의 추상성을 비판하고
‘생활에 도움이 되는 학문’을 추구하는 실학자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학문이란 백성을 이롭게 하는 데 쓰여야 하며, 글만 써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글뿐만 아니라 제도 개혁, 기술 개발, 행정 지침에까지 관심을 기울였다.

 

 

2. 정약용의 삶 - 박해와 유배 속에서 꽃피운 실학 정신

정약용은 1762년 경기도 남양주에서 태어났다.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유학과 사서삼경에 능통했으며,
형 정약전과 함께 천주교에 심취하면서 새로운 사상에도 개방적인 태도를 보였다.

▶ 천주교와 박해

18세기 후반 조선은 천주교에 대해 박해가 극심했다.
정약용은 천주교 신앙을 가진 가족과의 연루로 인해
관직에서 밀려나고, 결국 장기 유배 생활을 하게 된다.

 

그는 강진과 해남 등 남도 지역에서 18년간 유배 생활을 하며,
삶을 포기하는 대신 지식과 사상의 보고를 만들어 낸다.

이 시기 그는 무려 500여 권이 넘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고,
그중에서도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은
지금까지도 행정·법률·윤리 분야의 고전으로 평가된다.

 

 

3. 수원화성 - 과학과 행정이 만난 개혁의 결정체

1794년, 조선의 22대 왕 정조는 부친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옮기며,
이 지역을 이상적인 계획 도시로 조성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정조는 개혁 군주로서 신뢰하던 실학자 정약용에게
수원 화성의 설계 및 건설 실무를 맡기게 된다.

▶ 정약용의 과학적 역량

정약용은 이때 거중기(擧重機)라는 기계를 설계하여,
무거운 돌을 적은 인원으로도 쉽게 들어 올릴 수 있도록 했다.
이 장치는 도르래 원리를 응용한 조선판 크레인으로,
화성 건축의 효율성과 안정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그는 성곽의 구조, 방어 시설의 배치, 물자 수송 경로까지
철저히 계획하여, 당시로선 획기적인 건축 프로젝트를 완성시켰다.

화성의 건축은 전통과 근대적 효율이 만나는 상징이었으며,
정약용의 실용 학문이 실제로 구현된 대표 사례가 되었다.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오늘날 수원 화성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으며,
그 구조적 아름다움과 과학적 완성도, 효율성은 세계적으로도 인정받고 있다.
이는 정약용이 단지 ‘이론가’가 아니라, 실제로 구현 가능한 정책가이자 기술자였음을 보여준다.

 

 

4. 목민심서 - 진정한 공직자를 위한 실무서

정약용의 또 다른 대표작은 바로 『목민심서』다.
이 책은 지방 관료가 백성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한 책으로,
그는 유배 중임에도 불구하고 실제 관료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이 책을 집필했다.

▶ 구성과 내용

『목민심서』는 총 12편, 72조로 구성되어 있으며
다음과 같은 주제들을 담고 있다:

애민편(愛民篇):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 통치의 출발임을 강조

율기편(律己篇): 공직자가 스스로를 절제하고 청렴하게 살아야 함

봉공편(奉公篇): 국가와 왕실에 충성해야 함

정재편(政財篇): 재정의 공정한 운영을 위한 지침

진황편(賑荒篇): 기근, 홍수 등 재난 상황에서의 대처 방안

학교편(學校篇): 지역 교육과 유학 교육의 필요성 강조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추상적인 윤리가 아닌
행정가가 실제로 따라야 할 실천적 행동 지침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예컨대, 부임한 관리가 부임지의 상황을 어떻게 파악해야 하며,
백성의 고통을 직접 살펴보기 위해 어떻게 ‘순찰’을 다녀야 하는지도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5. 정약용이 남긴 유산 - 개혁, 민본, 실천

정약용은 단순히 ‘실학자’라는 호칭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는 실학을 학문이 아닌 사회개혁의 도구로 활용한 사람이다.

그는 끊임없이 말한다.

“백성을 괴롭게 하지 않는 것이 정치의 시작이다.”

“법은 백성보다 위에 있어선 안 된다.”

“학문은 반드시 현실을 이롭게 해야 한다.”

이러한 신념은 수원 화성과 『목민심서』를 넘어
『경세유표』(정치 체제 개혁안), 『흠흠신서』(형벌 제도 개혁서) 등
다양한 분야에서 빛을 발했다.

 

정약용은 실학자이자, 과학기술자이며, 법률가였고, 교육자이자 목민관이었다.
그는 ‘위에서 아래로’의 통치가 아니라, ‘아래로부터 위로’의 개혁 정신을 지녔던 인물이다.


오늘날 다시 읽는 정약용
오늘날 우리가 공공기관에서 부정부패를 우려하고,
정치인의 말보다 행동을 요구하는 이유는,
정약용처럼 말보다는 실천을 통해 진심을 보인 사람들이
역사 속에 존재했기 때문이다.

 

정약용은 당대 누구보다도 현실을 직시했고,
지식인의 역할이 단지 말하는 데 그쳐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설계도를 그렸고, 경판을 깎았으며, 글로 세상을 바꾸고자 했다.

 

그가 말한 “백성을 이롭게 하는 것”,
그 철학은 2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리고 『목민심서』 한 권과 수원 화성의 성벽 하나가
그 모든 정신을 후대에 말없이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