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와 전쟁으로 엮은 고려의 생존 전략
1. 서론: 고려 시대 외교의 핵심
고려(918~1392)는 주변 강대국과의 외교를 통해 부침을 거듭한 나라였습니다. 중국 왕조의 영향은 물론, 유목민족인 거란(遼, 요)과 서여진 및 여진(後金/금·여진 등)과의 관계는 고려의 안보와 발전에 직결된 이슈였습니다.
이 글에서는 고려의 외교 정책을 세 번에 걸친 거란과의 전쟁(제1·2·3차 여진전쟁)과 여진족 세력과의 관계 변화를 중심으로 다룹니다.
특히 형식적 외교, 방어적 전쟁, 전략적 회피의 세 축을 통해 고려가 어떻게 ‘활로를 열었는지’ 분석해 보겠습니다.
2. 고려 초기: 북방 세력 대응의 원칙
▶ 태조 왕권 확립과 북방 대응
918년 건국 후, 고려 태조 왕건은 후고구려·신라·후백제를 통일하며 내정을 다지는 한편, 송(宋)·거란(契丹) 등 북방 강대국과의 외교를 준비했습니다.
전략 요지는 두 가지였습니다.
√ 형식적 외교 체제 구축
당나라 및 송나라에는 사신을 파견하고 책봉 요청
외교적 정통성을 유지하며 외부의 간섭 최소화
√ 북방 유목민은 관습에 따라 대응
거란과 여진은 교역·약탈·혼인 등을 통해 긴장 완화
정식 조공이 아닌 교역관계 형성 → 유연한 국경관리
태조는 거란·여진에게 군사적으로 직접 도전하기 위해 여진을 정벌한 적이 있었지만, 내전 해결과 왕권 강화가 우선이었습니다.
이러한 초기 외교는 크게 세 가지 축—형식 외교, 방어 전략, 유연한 국경 관리—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3. 거란의 침입과 삼별초 혈전: 3대 여진 정벌의 교훈
고려 중기에는 거란 제국이 세 차례의 대규모 침입을 감행합니다.
이 전쟁은 고려 외교·군사 전략의 분수령이 되었습니다.
① 제1차 여진전쟁 (993년) – 초토 실수
원인: 거란이 요나라(契丹)를 세우고 발해 멸망 시도 → 고려 복속 요구
전개: 노협·은교 등 격전 → 고려군은 초기 큰 피해
결과: 강동6주 할양, 강제 조공 동의, 외교적 체제 강제 합의
의미: 단순 공세 대응이 아니라, 조공 체제, 외교적 대응 체제 수립의 출발
② 제2차 여진전쟁 (1010년) – 개경 함락
원인: 고려의 복속 거부 → 소손녕 지휘하에 거란 대군 재침
전개: 거란군이 개경(현 서울)을 점령 → 강화도로 임시 수도 이전
결과: 조공 약속 유지, 평양 북쪽까지 거란 주둔
의의: 외교와 회피 전략의 병행이 불가피하다는 사실 확인
③ 제3차 여진전쟁 (1018~1019년) – 강감찬의 격퇴
원인: 고려가 조공 부담 완화 시도 → 거란 황격
전개: 강감찬 장군은 광군·별무반을 동원하여 살수(영흥만) 전투에서 대승
결과: 거란은 고려 공격 포기
교훈: 주동적으로 거란을 제압하려는 시도는 없었지만, 능동 방어로 외교적 협상 주도권 확보
세 차례의 전쟁을 통해 고려는 다음과 같은 체계적 전략을 수립했습니다.
- 정규군 강화, 전문 군제(별무반) 도입
- 외교와 군사력의 병행
- 중원 왕조(송·금)와의 외교 균형
- 강퇴 전략으로 실익 확보
4. 송·금과의 외교 균형: 대외 둥지 전략
고려는 거란뿐 아니라 중국 왕조가 교체될 때마다 외교 전략을 조절했습니다.
- 1033년 송과 외교 재개 → 거란·금과의 외교 균형 모색
- 고려는 거란에 조공을 지속하면서, 송과의 공식 외교 체제도 유지
- 이후 금나라가 여진족 출신으로 세워지고, 대금국과도 관계 맺음
고려는 대송 외교 체제 + 거란 조공 체제 + 금과의 실용적 교역 기반 형성이라는 다중적 전략을 유지
이른바 ‘외교의 삼각축 전략’을 유지하며,
거란·여진·송·금 등의 세력 속에서 국내 안전을 확보했습니다.
5. 금·여진의 등장과 무신정권期
1200년대 이후, 금나라가 여진족 무장 세력의 일파를 기반으로 건국되면서 상황은 급변합니다.
금나라의 약화 → 여진 세력 및 몽골 세력의 순차 등장
고려는 금나라의 종주권을 인정하면서도, 여진 세력과 교역 유지
이후 몽골이 등장하자, 고려는 몽골 조공 체제로 들어가며
여진 및 여진계 후금/청에 대해 뚜렷한 정책을 수립하지 못함
이 시기에는 거란·여진과의 관계보다 몽골·금·여진 군벌들의 부수적 영향력이 더 큰 구조가 되었고,
결국 고려는 몽골 사대 체제 속에서 내부 정치를 개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6. 종합적 평가: 고려 외교 전략의 세 가지 축
고려가 천년 동안 생존하고 번영할 수 있었던 외교 전략은 크게 세 가지 축입니다.
축 | 전략 요소 | 세부 설명 |
1 | 조공외교 + 정식 외교체제 유지 | 송·금과 서신 왕래, 바다와 육지 외교망 구성 |
2 | 강호세력 대응형 군사 체계 | 별무반 혁신, 방어 조직 강화, 전쟁에서 협상 여지 확보 |
3 | 외교 균형 전략 | 거란-송-금 삼각 외교, 몽골 세력 합류 후 사대 전환 |
이 전략은 내부 안정 유지, 외세 간 균형 외교, 전략적 선제 방어 라는 세 불가결 요소가 유기적으로 결합된 구조였습니다.
7. 고려 외교의 현재적 시사점
고려는 약소국이었지만,
외교적 군사적 조합전략을 통해
세력 균형을 유지하며 내부 발전을 모색하였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은 현대 국가의
다변화 외교 체계,
외교·국방 병행 전략,
지역 세력 간 균형 외교
등에도 시사점을 던집니다.
8. 맺음말
고려의 거란·여진과의 관계는 단순히 침략자-피침략자의 대결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외교와 전쟁이 맞물린 ‘생존 전략’의 전개였습니다.
‘조공으로 평화유지’라는 외교적 안정화부터,
‘별무반을 통한 강수 전략’까지,
그리고 ‘외교 균형을 위한 중원국가와의 관계 조율’까지—
고려는 세운이 아닌 통합 외교 시스템을 통해 국가 안정을 지켜낸 사례입니다.
이 사례는 오늘날에도,
약소국이 강대국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며 자신의 길을 모색했던 역사적 기록으로 기억될 가치가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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