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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일(교육업)

일제강점기의 학생운동: 3·1운동과 광주학생운동

by 레오마니 2025. 6. 16.

청소년 독립운동가들이 남긴 뜨거운 함성

대한민국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유난히 ‘청소년’이라는 이름으로 쓰인 위대한 장면들이 존재합니다.
연필 대신 태극기를 들고, 교실 대신 거리로 나가
나라의 독립을 외쳤던 이들의 목소리는
오늘날에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일제강점기라는 참혹한 시기 속에서
학생들이 주도한 항일운동, 특히 3·1운동과 광주학생항일운동은
그 자체로 민족의식의 진화, 미래 세대의 각성, 조국 독립의 희망이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이 두 사건을 중심으로
당시 10대 청소년들의 치열한 독립운동 이야기,
그리고 그들이 오늘 우리에게 남긴 메시지를 깊이 있게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일제강점기의 학생운동: 3·1운동과 광주학생운동
일제강점기의 학생운동: 3·1운동과 광주학생운동

1. 시대배경 - 조선의 아이들이 독립을 외쳐야 했던 이유

1910년, 한일병합조약이 강제로 체결되면서 조선은 국권을 빼앗기고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합니다.
언론과 표현의 자유는 물론, 교육과 종교, 언어까지 철저히 통제되며
조선인으로서의 삶은 말살되어 갔습니다.

일제는 교육을 통해 민족 정신을 없애기 위해
‘황국신민화’ 정책을 펼쳤고,
어린 학생들에게 일본어를 강요하고 천황에게 충성하라는 내용을 반복 교육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억압의 구조 속에서
많은 청소년들이 깨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단순히 '배움의 주체'가 아니라,
변화의 불씨를 지핀 저항의 주체로 성장하게 됩니다.

 

 

2. 3·1 운동과 청소년의 첫 저항

1919년 3월 1일, 조선 전역을 뒤흔든 3·1운동은
민족 전체가 참여한 대규모 비폭력 독립운동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운동의 결정적인 동력 중 하나가 바로 학생들의 조직적 참여였습니다.

▶ 배재고보, 이화학당, 보성학교...

당시 서울을 중심으로 한 각 중등학교 학생들은
3월 1일의 거사를 준비하기 위해
비밀리에 자체 선언문을 복사하고, 태극기를 제작하며, 시위 계획을 세우는 역할을 자처했습니다.

특히 이화학당(현 이화여자고등학교)의 여학생들은
손글씨로 선언문을 수십 장 필사하여 유관순을 비롯한
여러 지역 학생 시위의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 유관순, 17살의 깃발을 들다

3·1운동을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유관순 열사입니다.
1902년 충청남도 천안 출신으로, 이화학당에 재학 중이던 그녀는
1919년 봄, 학교의 문을 닫은 뒤 고향에 내려가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합니다.

17세였던 유관순은 수천 명 앞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고,
이 운동은 일제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녀는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뒤에도
옥중에서 만세를 외치며 저항했고,
결국 고문 후유증으로 옥중 순국합니다.

짧은 생이었지만,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상징’으로
지금까지도 국민의 가슴에 기억되고 있습니다.

 

 

3.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 - 두 번째 만세의 물결

3·1운동 이후에도 일제의 억압은 더욱 거세졌지만,
그에 비례하여 조선 학생들의 민족의식 또한 깊어졌습니다.
그 절정은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에서 나타납니다.

▶ 발단은 사소했지만, 울림은 거대했다

1929년 10월 30일, 광주역에서 통학 중이던
광주고등보통학교의 조선 여학생이
일본인 남학생에게 모욕과 희롱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를 본 조선 남학생들이 항의하자
오히려 일본 경찰은 일본 학생을 두둔하고 조선 학생들을 구타했습니다.

이에 분노한 광주의 학생들은
11월 3일, 광주 시내 중심가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이게 됩니다.

▶ 조직적이고 치밀한 저항

광주 지역 학생들의 시위는 단순한 분노 표출이 아니었습니다.
학생운동단체인 성진회, 독서회 등이
사전 계획을 세우고 유인물을 배포했으며,
시위 당일에는 수천 명이 참여해 정확한 구호와 질서 속에 시위를 전개했습니다.

“조선 민족 교육 보장하라!”
“일본인 우대, 조선인 차별 중지하라!”
“조선어 교육 폐지 반대한다!”

광주뿐 아니라 나주, 목포, 서울, 평양, 함흥, 개성 등
전국 300개 이상의 학교에서 2만여 명 이상의 학생이 동참하며
그야말로 제2의 3·1운동으로 발전합니다.

 

 

4. 무명의 청소년 영웅들 - 이름없이 쓰러졌지만, 결코 잊혀지지 않았다.

광주학생운동은 유관순처럼 유명한 인물을 남기진 않았지만,
수많은 무명의 청소년 독립운동가들이 전국에서 활동했습니다.

서울 휘문고보의 박재혁: 일제의 교과서 개정에 항의해 투쟁

신의주 학생 김기정: 조선어 시간 폐지 반대 시위를 주도

경성제국대 학생 이윤재: 학생 자치조직 결성을 통해 광주운동 전국 확산

정읍 보통학교의 여학생들: 지역 농민과 연계하여 공동 시위 진행

그들은 체포되었고, 퇴학당했으며, 가족까지도 핍박받았지만
누구도 ‘두려움’을 이유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이 무명의 청소년 독립운동가들은
“배우는 자는 실천해야 한다”
한 줄의 신념으로 역사의 현장에 선 인물들이었습니다.

 

 

5. 학생운동이 남긴 유산 - 민족의식의 세대 계승

3·1운동과 광주학생운동은 단지 과거의 항일운동이 아닙니다.
이들은 해방 이후 4·19 혁명, 부마항쟁, 5·18 민주화운동,
그리고 오늘날 청소년 인권운동의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학생운동은 한국 사회에서
‘가장 먼저 깨어나는 세대’, ‘도덕적 정당성을 가진 저항 주체’라는
역할을 상징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교과서 속 유관순과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사진은
단순한 기록이 아닌,
“이 땅의 청소년도 한 나라의 미래를 이끈다”
상징이자 자부심으로 자리잡았습니다.

 

 

6. 기억하자, 이름 없는 학생들의 함성

일제강점기라는 어두운 터널 속에서
조선의 청소년들은 눈을 감는 대신 깨어 있었고,
침묵하는 대신 자신의 목소리로 저항했습니다.

3·1운동을 이끈 여학생들,
광주역에서 일본 학생의 횡포에 분노했던 고등학생들,
그리고 이름 없이 사라진 무명의 학도들.

그들의 이야기는 단지 과거가 아닙니다.
지금의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권리, 언어와 문화는
바로 그들이 거리에 서서 외친
“대한독립 만세!”의 메아리 속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청소년의 목소리는 작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때로는 가장 강한 함성을 가진 존재였습니다.